헌금이 신앙이듯 헌금 쓰는 것도 신앙
한국인·한국교회 돈에 대한 이중적 태도...헌금 투명하게 쓰이는지 살펴야

한국 사회에서 돈은 이중성을 가진다. 유교적 전통을 가진 과거 조선 시대에는 돈을 더러운 것으로 여겼다. 양반들은 돈을 가까이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가졌기에 돈에 손을 대는 것조차 꺼려했다고 한다. 그래서 돈주머니를 던져 주고는 알아서 찾아가라 하기도 하고, 막대기나 곰방대에 엽전을 꿰어서 돈을 전해 주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돈에 대한 생각은 아직도 우리 가운데 남아 있다. 돈의 액수나 돈을 주고받는 것에 대해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직도 부끄러워하고, 남세스러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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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요즘 한국 사회를 보면 돈이 모든 것의 목적이다. "부자 되세요!" 하는 인사가 한때 유행이더니 이제는 "대박 나세요!" 한다. 전에 성공회의 박경조 주교께서 자신이 왜 영성 운동에 관심을 갖는지를 설명하셨다. 어느 지방의 교회를 찾았는데 사회를 보시는 분이 당신이 왔다고 인사를 이끄는데, 회중들에게 "부자 되세요!" 하더란다. 그래서 '교회가 왜 이렇게 됐나' 하고 깜짝 놀라서 영성 운동을 한다고 했다.

어디 그뿐인가. 요즘 아이들에게 장래 희망을 물으면 1위가 부자가 되는 것이고, 2위가 연예인이 되는 것이라고 한다. 즉 이 사회는 돈 많이 버는 것이 모든 이들의 소망이 되었다. 아이부터 해서 어른들까지, 그리고 교회마저도 이 돈의 논리에 빠져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참 아이러니다. 돈을 더럽다고 여기고, 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면서, 또 돈이 최고라고 하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 헌금이 거룩하다면 쓰임까지도 거룩해야 한다. 돈을 헌금으로 드리는 것이 신앙의 행위라면, 그 헌금이 어떻게 쓰이는지 살펴보는 것도 신앙의 행위라고 생각한다.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돈에 대한 교회의 시각은 어떤가. 이와 그렇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헌금이라고 해서 돈을 그 무엇보다도 거룩하게 본다. 하나님께 드린 것이고, 하나님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헌금 기도를 들어 보면 이러한 시각이 드러난다. 예를 들어서 거룩한 제물로 표현하기도 하고, 때로는 이러한 제물을 '흠향'이라는 유교적 제사 용어를 갖다 붙여 거룩하게 만든다.

그런데 돈의 흐름이나 쓰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런 것에 관심을 갖는 것이 마치 더러운 것을 대하는 유교 양반의 자세와 비슷하기도 하고, 그런 것을 따지면 속된 것처럼 치부하기도 한다. 즉 돈을 내는 것은 거룩하게 생각하면서, 그 쓰임에 있어서는 그 거룩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이중적 태도 때문에 교회는 항상 돈을 둘러싼 잡음이 끊이지 않는다. 돈을 모으는 것에는 각종 이름을 붙여서 다양하게 모으고, 이름을 공개하여 격려하고, 그래프까지 그려 붙여 독려한다. 요즘이야 그런 이야기를 듣기 힘들지만 과거에 한국교회가 열심이 넘칠 때는 집을 팔았다는 분들이나 돈이 없어서 금가락지를 뽑아서 드렸다는 '전설'들도 있었다. 헌금을 모으고, 드리는 것에는 이렇게 열심인 곳이 우리 한국교회이다.

그런데 그렇게 드린 거룩한 돈이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회계 보고를 요구하는 사람도 없고, 돈의 쓰임을 합리적으로 보고하는 교회도 드물다. 나는 드렸으니까 신앙인으로서 그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고, 돈이 쓰이는 것은 목사와 장로들이 알아서 하겠거니 한다. 그러다 보니 돈이 쓰이는 곳에 견제나 확인의 절차가 없는 것이다.

내 나이 오십이 가까워 오지만 공금을 썼던 것은 대부분 교회에서였다. 학생회에서 예산을 타 쓰고 나누었던 것이나 전도사와 목사로서 재정을 다루었던 것이 다였던 것이다. 삶의 환경이 보통 그랬으니까 당연하다. 그리고 교수 생활을 하는데, 평교수의 경우는 재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접할 기회가 없다.

최근 학교의 행정에 관여하게 되었다. 처음 돈과 관련된 행정을 접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참 많이 놀랐다. 교육을 위해 쓰여야 할 예산이 허투루 쓰이지 않게 하기 위해 학교에서는 이중, 삼중의 견제와 감시의 시스템을 마련해 놓고 있었다. 즉 돈의 쓰임을 계획하는 이, 돈을 직접 관장하여 내주는 이, 그리고 직접 예산으로 쓰는 이가 다르게 해 놓았다. 그러니 삼중으로 서로를 견제하고 감시할 수 있는 것이다.

헌금이 거룩하다면 쓰임까지도 거룩해야 한다고 본다. 돈을 헌금으로 드리는 것이 신앙의 행위라면, 그 헌금이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를 잘 살펴보는 것도 신앙의 행위라고 생각한다. 또한 교회 역시 헌금을 하라고 광고하고 독려했다면, 그 돈의 쓰임을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그것이 바른 응답이고, 합리적인 방법이다. 교회 안에서 돈에 대한 이중적 태도를 버리고, 돈을 통해 교회가 더욱 거룩하여지기를 기대해 본다.

조성돈 /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목회사회학 교수

목회자인 내가 세금 내는 이유
대한민국 시민의 의무…신고 과정도 쉬워

일 년이라는 시간이 이렇게 빨리 지날 줄이야. 이든교회가 시작된 지 벌써 일 년이나 지났다. 새롭고 건강한 교회가 되겠다는 꿈을 꾸며 시작한 이든교회가 그동안 그 꿈을 얼마나 이루었는지 돌아보면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든교회가 출발하면서부터 이룬 꿈이 하나 있다. 바로 목회자가 세금을 내는 건강한 시민으로 살겠다는 꿈이었다.

얼마 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교회협)가 회원 교단에 '목회자 납세 추진' 협조를 요청하는 공문을 보냈다고 한다. 목회자들이 자발적으로 납세를 하여 사회로부터 존중받는 한국교회를 만들자는 의도라고 한다. 그러나 분명히 하건데 필자는 엄청난 존중을 받을 요량으로 소득세 신고를 결정한 것이 아니다. 단지 소득세 신고가 시민으로서의 의무이며 정의로운 삶을 사는 방식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임을 밝히는 바이다.

이든교회는 창립 전부터 목회자가 세금을 내기로 교우들이 결의했다. 목회자가 워낙 "연약한 존재"이기에 한 번 내뱉은 말을 결코 주워 담을 수 없도록 하기 위한 장치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세습하지 말라고 정해진 법도 꼼수로 뒤집는 마당에 결의한 것을 시행하지 않고 차일피일 넘기면 결국 안 하고 넘어갈 수 있었으리라. 이든교회는 사람의 연약함을 알기에 꼼수를 부릴 수 없도록 한 번 결의한 사항을 아주 신속하게 처리했다.

우선 교회 정관을 교회 개척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교우들과 논의를 통해 미리 준비해 놓았다. 여기에 단체의 대표자를 확인할 수 있는 서류가 필요했기에 교회 창립 후 대표자 선임을 위한 운영위원회를 5월 28일에 열어 필자가 대표자임을 결정했다. 이든교회 교우들이야말로 믿음이 참 좋은 분들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여기에 법인으로 보는 단체의 대표자 등의 선임신고서를 작성하였다. 그런데 임대차계약서가 더 필요했다. 좌절의 순간이었다. 왜냐하면 이든교회는 교회 공간을 따로 마련하지 않고 공간을 빌려 쓰는 교회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든교회는 교회개혁실천연대·성서한국 회의실을 빌려서 매주 예배를 드리고 있지 않은가. 이 경우 임대차 계약서를 대신하여 전대동의서가 있으면 되었다.

이제는 교회개혁실천연대·성서한국에게 은총을 베풀어 달라고 요청할 차례였다. 여기서 이든교회의 요청을 거절하면 이 단체들을 음해할 작정이었다. 역시나 필자는 "연약한 존재"였다. 그러나 교회개혁실천연대·성서한국은 이든교회의 요청을 너무도 흔쾌히 수락해 주셨다.

이 모든 서류를 구비하여 7월 11일 영등포세무서에 제출하였고, 이후 7월 13일에 수익 사업을 하지 않는 비영리법인 및 국가기관, 즉 '법인으로 보는 단체'로 등록이 완료 되었다. 이제는 실제적 소득세 신고를 하기 위해 '원천징수이행상황신고서'를 제출하는 일이 남았다. 신고는 월 급여를 지급한 날이 속하는 달의 다음 달 10일까지 교회 주소지 관할 세무서에 신고해야 한다(이 모든 일을 이제는 집에서 인터넷으로 할 수 있다. (www.hometax.go.kr). 이에 8월 10일에 원천징수이행상황신고서를 영등포세무서에 제출하였다. 그리고 필자는 이제 세금을 낼 수 있게 되었다.

목회자 소득세 신고, 아니 노동자로서의 소득세 신고는 전혀 어렵지 않았다. 행정적 절차가 번거로울 것이기에 신고를 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변명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는 교회재정건강성운동(www.cfan.or.kr)에서 제작한 <목회자 소득세 신고 어렵지 않아요>라는 친절한 책자가 있지 않은가.

목회자 소득세 신고는 목회자 스스로가 바른 시민으로 살기로 결심하기만 하면 너무도 쉽게 해결할 수 있는 것이었다. 여기에 목회자라는 직업은 '성직'이라는 고양된 사명감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 목회자는 기본적으로 이 땅에 사는 시민 아닌가. 그러므로 시민으로서의 기본적 의무를 다하는 것이야말로 이 땅의 불의에 대해 예수님의 카운터펀치를 날릴 수 있는 목회자로서 역할의 시작이 되는 셈이다.

이제 목회자가 세금을 내지 않는 것은 창피한 일처럼 여겨지는 시대가 되었다. 여기서 더 주저하다가는 본전도 못 찾게 될 날이 머지않았다. 목회자님들. 용감하게 세금 냅시다!!

한희준 / 이든교회 목사

교회 예산 살펴보면 교회 건강이 보인다
회계장부와 예산은 제자도의 핵심 헌장

미국의 대표적인 복음주의 공공신학자 짐 월리스(Jim Wallis)는 <하나님의 정치>에서 "예산은 도덕적 문서다(A budget is a moral document)"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 독특한 언사는 그동안 낙태와 가족 문제에만 도덕을 들이댔던 공화당에게는 연방 정부의 예산도 그 못지않은 도덕적 이슈임을 제기하고, 정치에서 도덕의 문제를 거론하기 꺼려했던 민주당에는 예산과 같은 첨예한 정치 행정적 사안에도 도덕과 가치의 언어를 되살릴 것을 주문한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군비에는 어느 정도의 예산을 배분할지, 복지, 청년 실업, 녹색 성장 등에 예산을 어떻게 배분할지는 소수의 엘리트 관료나 정치인에게 맡길 문제가 아니다. 또한 나라의 전체 비전과 가치에 부합하는 예산은 그 자체로 강력한 연설(설교)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짐 월리스는 어느 한쪽의 프레임에 기대지 않으면서도 오히려 양쪽을 더 높은 차원으로 견인하는 탁견을 남겼다.

교회의 예산과 회계장부도 마찬가지이다. 아니 오히려 그 이상이다. 교회의 예산과 회계장부는 제자도의 핵심 헌장과도 같다. 예산이 교회 전체의 비전과 사명에 부합하는지, 성경이 말하는 가치에 충실한지, 재정이 공명 정대하고 불편부당하게 관리 운영되며 집행되고 있는지는 절대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교회가 영적으로 건강한지, 성경적으로 균형 잡혀 있는지를 평가할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은 것이다. 교회가 밖으로 내세우는 거창한 표어가 재정과 회계로 뒷받침되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공허한 외침이요 심하게는 거짓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필자가 예전에 교회에서 중고등부 교사를 할 때이다. 보통은 중고등부 예산만 보는데 어느 날 교회 전체 예산을 가만히 들여다본 적이 있었다. 놀랍게도 교회 전체 부서 중에서 중고등부 예산이 가장 적은 것을 발견하고 자괴감이 들었다. 심지어는 유치부 예산보다 적은 것을 발견하고는 씁쓸해하기도 했다. 교회의 주요 사역자들은 자주 청소년이 우리 교회의 미래라고 집회 때마다 말씀하시곤 했는데 단순한 립서비스처럼 느껴졌던 기억이 있다. 그 후로 여러 차례 중고등부의 예산에 대해 담당 장로님께 말씀을 드렸으나 별로 나아지진 않았다. 마치 예산과 재정은 또 다른 논리로 정해지는 것 같은 벽을 느꼈다.

예산과 재정이 이처럼 중요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회계와 숫자는 접근하기 어려운 것처럼 보인다. 일반인들이 알 수 없는 전문 기술적인 언어로 되어 있어 의료계와 법조계와 더불어 진입 장벽이 높은 대표적인 분야 중의 하나이다. 자산, 부채, 재무상태표 등 이제는 일반화되어 비교적 알기 쉬운 용어도 있지만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여전히 암호와도 같은 용어와 숫자로 가득 차 있는 경우가 많다. 좀 더 쉽게 이해하고 접근할 수 있도록 제도적인 개선이 필요하다. 하지만 동시에 성도들에게도 관심과 참여가 필요한 부분이라 생각한다.

어떤 일이든 소수 엘리트와 전문가에만 맡기는 것은 곤란하다. 우리에겐 법률, 의료, 회계, 목회 전문가가 필요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삶과 신앙, 건강에 대해서는 스스로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 누군가에게, 그것이 전문가라 할지라도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맡기는 것은 위험하기도 하거니와 바른 태도도 아니다. 더군다나 교회는 공동체이다. 회계를 담당하는 전문가를 세워 섬기게 할 수 있지만 그것의 전체 운영과 과정은 모든 성도들이 투명하게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전문가를 돕는 길이며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살리는 길이다. 귀찮고 어렵다고 외면하면 한 지체된 성도로서의 책임을 회피하는 일이다.

공동체로서 성도들이 재정에 참여할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 투명하고 공개적인 운영이 필요하다. 회계 보고와 예산 수립을 파워포인트 화면이나 구두로만 진행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래서는 정확한 파악이 힘들다. 회계 보고 자료가 유인물로 제공되어야 하고 교회 홈페이지에도 매월 회계 보고를 게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원칙적으로는 성도들이 언제든지 궁금하면 자료를 열람하거나 질문할 수 있어야 하고 의견도 제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회계도 사람의 일인지라 실수와 오해가 없진 않겠지만 그것 또한 공동체로서 교회가 함께 감당하며 풀어 갈 일이다. 감추고 숨기려 들면 거기엔 곰팡이와 좀이 쓸 가능성이 더 높다. 무엇보다 진실에 기반하지 않은 교회를 교회라 할 수 있을까.

최삼열 / 기독경영연구원 사무국장, 교회재정건강성운동 실행위원

깨끗한 교회 재정 관리는 기록에서 시작
교회 재정의 투명성, 책무성, 그리고 건강성

한 사람의 삶이 투명하다는 것은 그 사람의 삶이 유리알처럼 깨끗해서 흠잡을 데 없다는 뜻이 아니다. 도리어 이 표현은 그의 삶의 크고 작은 실수와 허물도 볼 수 있도록 소탈한 일상과 관계를 유지하고 지낸다는 칭찬으로 쓰인다.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완벽주의자가 아니라, 허술한 구석은 있으나 성실한 그 삶에 진정성이 보여서 가까이 하고 싶은 사람의 모습이다. 마음이 청결한 자가 복이 있어 하나님을 뵐 것이라는 팔복의 한 구절도 그의 심령이 이미 100% 성화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영혼의 창이 투명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것이라는 해석이 더 감동적이다.

그럼 교회의 재정이 투명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영혼과 삶의 문제를 다루다가 돈과 숫자를 언급하니 온도 차가 크게 느껴지지만 거반 다르지 않다. 이 역시 오탈자 하나 없이 과정상의 실수 하나 없이 완벽하게 처리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가장 근접한 표현은 '관찰 가능하다'라는 표현인 듯하다. 모든 거래에 깨알 같이 빈틈없는 회계 처리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은 성실하고 정직한 기록과 그 기록에 원하는 이들이 접근할 수 있는 공적 관리를 요청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기장 오류가 있었다면 그 오류를 바로잡은 기록까지, 이런저런 공과금에 과·오납이 있었다면 이를 돌려받은 기록까지 있는 그대로 보존되는 것을 의미한다. 즉, 미래의 어느 시점에 누구나 질문 가능하도록, 대내외적인 감사가 가능하도록 해놓는 회계 처리와 기록 구조상의 공개성이다. 그 반대의 개념이 폐쇄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투명성과 공히 밀접하게 대두되는 것은 책무성이다. 이렇게 관찰 가능한 기록들이 잘 보존되면 이를 토대로 어떻게 집행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 또 어떤 개인과 조직이 이를 수행하고 바로잡을 책임을 가지는지를 소통할 수 있게 된다. 필연적으로 투명성보다 포괄적 가치이다. 투명성이 기초적으로 사실 관계에 대한 믿음을 소통하는 단계라면, 책무성은 더 나아가 인격에 대한 신뢰를 주고받는 단계이다. 개인이든 조직이든 누가 어떤 이유로 어떤 방식으로 그 재정을 다루고 있고, 과연 이를 신뢰할 수 있는지를 보게 되는 지점이다.

그리고 이 책무성을 넘어서면 결국 건강성의 문제를 다룰 수 있게 된다. 그동안 어떤 방향으로 재정이 집행되었는지 분석이 가능하고, 교회가 추구하는 가치와 목회 철학과 선교 전략에 부합하는지 여부도 평가가 가능하다. 개인이든 조직이든 신뢰하는 대상과는 미래를 상의할 수 있다. 건강하다는 개념 역시 상당 기간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재생산하며 사역이 종료되더라도 아름답게 마무리할 수 있다는 전망을 가능하게 한다는 의미이다. 교회의 재정이 건강한가의 여부 역시 사역의 미래상을 재정과 결부시켜 논의할 수 있는지의 여부일 것이다.

많은 부모들이 자녀들이 용돈기입장을 잘 관리하면 용돈에 인센티브를 얹어 주고, 그렇지 않으면 용돈 인상 시기를 조금씩 늦추는 식으로 용돈과 결부된 정직성의 부담을 주고 있다. 과세 당국도 성실한 기장 내역을 제출하는 사업자에게 세제상의 혜택을 주고 있다. 결국 투명성의 문제는 기본적인 성실과 정직의 문제로 치환된다. 교회 조직이 의도된 악의가 없다면 투명한 재정 관리, 즉 관찰 가능한 재정 기록을 남기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 맞다. 다만 이를 넘어선 목표를 가지고 시작해야 할 것이다. 신뢰를 얻게 되는 재정의 책무성, 비전을 갖게 되는 재정의 건강성이 그것이다.

황병구 / 한빛누리 재단 상임이사, 교회재정건강성운동 실행위원

세금 내는 목사는 '삯꾼' 목사다?
목회자 역할 결정하는 것은 소득 명칭 아닌 소명 따라 사는 삶

"사람들이 선호하고 취업하기 좋다는 학과에 진학한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였지만, 쳇바퀴 같이 돌아가는 직장 생활이 지겨워집니다. 마음 같아서는 금방 사직서를 제출하고 보람 있는 일을 찾고 싶지만, 가족들의 생활비를 생각하다 보니 사직서를 생각하기는커녕 생활비 목줄을 쥐고 있는 사장님의 눈치만 보게 되고, 학창 시절에 가졌던 꿈은 어디 갔는지 찾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어찌해야 하나요?"

위와 같은 상담을 받으면 "우리가 하는 일은 돈을 버는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달란트를 이 땅에서 실현하는 과정이고, 우리의 일용할 양식(생활비)은 회사의 사장(고용주)이 주는 것이 아니라 회사의 손을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공급하시는 것입니다. 외형적으로 나타나는 형식이 아니라 본질적인 부분으로 돌아가야 합니다"라고 일반적으로 대답한다.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역할은 그것이 직장인 또는 사업자와 같이 돈을 벌든 아니면 가정주부와 같이 돈을 벌지 않든 모든 역할은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사용하여 하나님이 다스리라고 맡겨 주신 이 땅을 관리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직업과 역할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과정으로서 성스러운 것이다. 일의 결과로 얻게 되는 소출은 수고하며 경작한 땅이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각자의 필요에 따라 허락하시는 공급이다.

새해 들어 정부가 종교인 과세 개정안(입법 예고)을 예고하면서 목회자 납세 문제가 다시 논란이 되고 있다. 목회자들은 돈 때문에 사역하는 것이 아니고 삯꾼 목자도 아닌데, '근로'소득세를 납부함으로 스스로의 정체성에 상처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삯꾼 목자가 비난받은 것은 삯을 받기 때문이 아니라 어려움이 닥칠 때 목자의 본분인 양을 돌보지 않고 달아났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선적으로 고민해야 할 기준은 삯 여부 보다 주신 달란트의 소명을 지키느냐, 아니면 소명을 버리고 달아나느냐의 차이이다. 주신 달란트의 소명에 대한 고민에는 목회자, 평신도를 구별하는 의미가 없다.

만약 목회자만 삯을 목적으로 일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사례비 등이 소득이 아니라고 하면, 근로소득이든 사업소득이든 소득을 수령하는 일반 직업인은 삯꾼이 되어 버린다. 목회자들이 교회 강대상에서 교인들에게 맘몬을 섬기지 말고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라고 선포하였지만, 일반 성도들이 세상에서 돈을 목적으로 살아가는 삯꾼으로 치부되는 상황에 대해 아무런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다는 관점이 더 심각한 문제이다.

목회자의 사례비·생활비 등은 교회가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므로 이 땅에 세금을 낼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세상의 주관자로서 사람의 손길을 통하여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생산하는 소출, 우리가 벌어들이는 소득은 표면적으로는 자연과 사람으로부터 얻는 것이지만 그들을 통하여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 나가는 하나님의 섭리를 인식하지 못하는 오류이다. 레위 지파에게 십일조를 나누도록 한 것은 열두 지파 중 분깃이 없었기 때문이고, 다른 지파들의 소득으로 레위 지파에게 배분 되었지만 다른 지파들은 공급의 주체가 아니라 '배분의 통로'였다.

목회자만 하나님으로부터 생활의 필요를 충족하고 다른 평신도들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생활의 필요를 충족하는 것이 아니다. 이 땅에선 모두가 자연 또는 다른 사람을 통하여 소출과 소득을 수령하지만 공급자는 하나님이시다.

많이 가지고, 많이 버는 사람들로부터 일정 금액을 징수하여 소득이 적은 사람들의 복지를 위하여 사용하자는 관점에서 세금은 '여유로움으로 저희의 부족함을 보충'하는 연보의 취지(고후 8:14)와도 상통한다. 따라서 부과되는 의무이기에 부담하는 세금으로서가 아니라 능동적으로 공동체내 연약한 지체들을 돕는 능동적 실천 과정으로서 세금에 대한 인식을 전환할 때 그리스도의 사랑이 세상에서 향기를 발하게 된다.

최호윤 / 삼회회계법인 회계사, 교회재정건강성운동 실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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