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금의 짐과 영적인 짐

최근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의 종교인 과세에 대한 발언이 쟁점이 되고 있다. 20064월 국세청이 당시 재정경제부에 종교인에 대한 과세가 가능한가?”라는 질의가 있기 전부터 사실 종교계 내에서는 꾸준히 자발적인 근로소득세 납부 운동이 있어왔다. 현재 개신교 9개 교단으로 구성되어 사회에 대한 책임의식과 정의로운 사회구현을 표방해온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목회자 과세운동을 범 교단적인 차원으로 발전시키기로 방향을 잡고 있으며, 보수 개신교계를 대표하는 한국교회언론회에서도 납세라는 국민의 의무를 성직자들이 반대한 사안이 아님을 근래 밝혔다. 가톨릭도 1994년부터 소득세 납부를 결의하였고, 조계종도 원칙적인 찬성의 뜻을 밝혀온 바 이번 개신교계의 반응을 볼 때, 앞으로 종교인 과세문제는 더 공론화 될 것으로 기대된다.

그동안 종교단체는 순수한 종교행위를 전제로 한 비영리단체로 분류되었기 때문에 법인세나 증여세 등의 면제혜택을 받아왔으며, 성직자의 소득 또한 영적봉사에 대한 예우금이나 봉사비로 이해되어왔다. 현실적으로 성직자의 80% 정도가 면세점(세금을 면제하는 기준 한도) 이하이기 때문에 성직자에 대한 과세의 실효성도 의문시 되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법에 명시된 납세의 의무 차원에서 공평과세는 종교단체나 성직자도 예외일 수 없다는 입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고, 일부 종교단체의 탈세의혹과 헌금과 연루된 성직자의 부도덕성에 대하여 종교단체의 재정 투명성이 요구되고 있다. 따라서 차제에 실정법 차원에서의 법의 형평성과 종교적 차원에서 도덕적 규범 회복에 대한 자발적인 노력이 더욱 기대되고 있다.

이번 종교인 과세문제는 헌법에 명시된 종교의 자유납세의 의무사이의 자유민주주의적 기본질서에 대한 충돌로 비쳐질 수 있다. 그동안 종교단체와 종교인에 대한 비과세는 종교 활동의 자유를 보장하는 불문율이었기 때문에, 과세라는 법의 형식적 논리는 자칫 종교에 대한 국가의 억압으로 비쳐질 수 있으며, 대다수의 면세점 이하 성직자들에 대한 납세의 절차가 법적으로 미미한 상황에서 과세는 마치 성직자들이 일부러 납세를 회피한 것처럼 종교의 이미지를 추락시킬 수 있다. 그러나 종교인이라 할지라도 국가공동체의 복지후생을 위하여 정직한 납세의무를 다하여야 하는 국민의 의무에서 제외될 수 없으며 국가가 국민의 납세에 대한 윤리적인 능력과 목적을 분명히 하는 한, 굳이 회피할 명분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현재 개신교는 교회 재정의 투명성 문제로 교회 내/외적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데, 핵심은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복음이 문제가 아니라 교회를 치리하는 지도력과 성원의 합리성, 그리고 교회 공동체의 의식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막스 베버(Max Weber)는 자본주의의 발전을 가져온 칼빈주의에서는 개인과 윤리간의 분열은 없었다고 강조하면서 그 이유로서 칼빈주의의 윤리적 공적주의와 직업개념이 그 특성이라고 주장하였다. 전자는 청교도 상인에게서 발견되는 금욕주의이고 후자는 철저한 구원이라는 자기 확신을 보장하여 주는 직업노동이었다. 마찬가지로 한국교회에 대한 세금 논쟁은 단지 세금의 법적 도덕적 문제에 대한 것이 아니라, 목회자는 세금에 대하여 얼마나 윤리적으로 생각하는지에 대한 인식의 전환에 달려있다고 본다. 윤리와 직업에 대한 인식이 공적 영역에서 분리되지 않고 책임의 의무로 다가올 때 목회자의 세금은 오히려 사회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종교개혁자 칼빈과 마틴 루터는 얼마의 돈을 내고 영혼을 사려고 하였던 당시 교황청의 도덕적 문제에 대하여 개혁의 기치를 높였다. 그러나 공적 영역에서 사회의 질서를 책임질 당시의 체제에 대하여 세금을 내는 것을 의무라고 보았다. 이는 국가의 질서를 유지하며 동시에 국가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세금을 내는 것을 신앙인의 책무라 여겼던 것이다.

루터는, 당시 왕정시대에 교황이 독일인들에게 세금을 거두었던 본래의 이유는 터키와 이교도로부터 기독교를 보호하기 위함이었다고 상기시켰다. 따라서 평신도와 성직자 모두 세금을 내었는데 그 후 수백 년이 지나도록 교황청은 세금을 본래의 목적과 상관없이 일상적으로 거두고 교황청을 짓는 일에 낭비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루터의 당시 관점을 현재의 목회자의 납세문제와 연관하여 볼 때, 만일 국가가 기독교의 활동과 신앙의 자유를 보호하여 주고 한국 내 기독교인의 인권과 생명을 지켜준다면 세금납부의 문제는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이 될 것이다. 물론 국가의 예산을 기독교가 사용할 때 정교유착의 비난을 받을 수 있지만, 실제적으로 국가가 교회의 성지 보전을 위하여 국가예산을 사용하고 있으며 기독교 학교와 기독교 관련 복지관, 기독교 관련 교도소, 교회연관 유치원등의 다양한 교육시설에 예산을 주고 있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종교인 과세문제는, 종교와 세금이 각각 도덕적 규범이 요구하는 사회질서 유지와 통합의 차원에서 볼 때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다고 본다. ‘종교의 자유는 순수한 종교적 목적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부과되는 기본권이지만, 영토를 근거로 한 근대국가의 형성에 있어서 국민의 주권과 안정을 보장하는 국가의 도움 없이 종교의 자유를 상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종교단체와 종교인의 지위가 국가에 의하여 보장되는 한, 세금은 국민으로서의 모든 의무를 다하는 종교인에게도 필수적이다. 그러나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한, 국가는 종교인 과세라는 쟁점에 있어서도 그동안 국가사회의 발전을 위하여 노력한 종교단체와 성직자의 존엄과 가치를 존중하여야 할 것이다. 이 사안이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민주적인 의사소통의 과정과 수렴을 통하여 공익을 위한 최선의 길이 무엇인지 국가와 종교가 함께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한국사회의 양극화 문제, 그리고 교회가 겪고 있는 양극화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의 것을 독점적이고 배타적으로만 소유하지 말고 본래의 목적에 맞게 서로 나누어야 하는 것이다. 유통되지 않는 화폐는 그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듯이 나누지 않는 기독교의 사랑은 의미가 없다. 불법이 성행하면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진다고 성서는 증언한다(24:12). ‘사랑이 식어진 기독교의 현 모습은 양극화의 모습과 다름이 아니다. 국가 경제의 위기 속에서 기독교인이 할 수 있는 일은, 희생과 헌신이 생략된 겉치레의 기독교인이 아니라 한국 사회에 만연한 분열을 화해시킬 수 있는 사랑의 정신을 가지고 예수님처럼 몸으로 보여주는 일에 앞장서는 것이다. 따라서 세금의 문제를 국가의 법이나 아니면 기독교의 신앙의 자유라는 이원론적 입장에서 보지 말고, 세금이 국가와 기독교의 온전한 통합과 연대로 나아갈 수 있다면 적극적으로 세금납부를 지향하여야 할 것이다.

자신을 가난하게도 말고 부하게도 말고 오직 필요한 양식을 구하였던 잠언기자의 고백이 교회와 목회자의 고백이 되어야 할 것이다. 교회의 유일한 사명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리는 복음이기 때문에 목회자는 세금의 짐이 아니라 이 복음의 거룩한 짐을 지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겨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회보존과 질서를 중시하는 온전한 통합의 원리로 목회자에게 세금을 원할 때, 목회자가 한 국가의 시민인 한 세금을 내는데 앞장설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종교단체와 종교인의 유일한 사명은 영혼을 위한 영적 짐을 지는 것이다. ‘세금의 짐도 져야만 한다면 그것은 이 아니라 어려움을 서로 함께 나누는 따뜻한 이 되어야 할 것이다. ‘종교 과세가 법의 형식을 넘어서서 이웃을 염려하고 함께 공감하는 성숙한 조세문화로 발전하기를 기대한다.

 

유경동 교수 / 감리교신학대학교에서 기독교윤리학을 가르치면서, 바른교회아카데미 연구위원으로 섬기고 있다.

 

(원문보기)

http://gcacademy.tistory.com/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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