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무리들

많은 교회에서 교인들이 주일날 같이 모여 예배 드리고 같이 밥 먹고 헤어진다. 마치 우리가 학원에서 특강을 듣고 끝나면 다른 수강생이 누군지 관심 없이 뿔뿔이 헤어지고, 일반 식당에서 여러 사람들과 같이 식사하더라도 옆 테이블에 앉은 사람이 누군지 상관하지 않고 본인의 식사만 하고 헤어지는 것과 같이.
공동의회가 열리더라도 많은 교인들은 회의 내용에 대하여 고민하기보다 좋은 것이 좋다는 생각에 자리만 채우고, 시간만 채우고 빨리 끝나기를 기다린다. 무언가 같이 고민하고 상의할 것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한 몸된 지체들의 관계인가?
공동체를 한 몸(one body)의 지체(parts)관계의 연결로 본다면 현대 교회에서 공동체성을 찾기가 쉽지 않다. 많은 대형교회 심지어 중소형교회에서조차 교인들은 교회에 손님으로 왔다가 차려진 밥상이 시원찮으면 직접 밥상을 차리기보다는 또 다른 밥상(?)을 찾아서 방황하는 실정이다. 마치 예수님 시대에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의 이적과 기사로 미혹 당하는 무리들(막13:22)과 표적(miraculous sign)을 찾아 다닌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같이.


2. 표면적 교인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스스로 방랑하는 교인의 책임으로 규명할 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교회가 교인들의 공동체성에 기반한 자주성을 기대하지 않았음을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교인들의 의견들을 들어보고, 서로의 의견에 차이 나는 원인을 조정하는 것이 바른 방법이지만 많은 교인들의 다양한 의견들을 들어보고 조정하자면 1) 서로 다른 의견을 듣고, 자신의 의견을 설명하고 상대방을 이해시키는 지루한 과정을 거쳐야 하며, 2) 발생할 지도 모르는 교회 방향성의 왜곡에 대한 부담도 있고, 3) 공간과 시간의 현실적인 제약을 이유로 비효율적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에 소수의 결정을 따라 교회의 의사는 정해진다.

이러한 상황에선 공동체의 실질적인 구성원인 일반 교인들은 이해되지 않는 생각을 가지거나 기존의 생각들과 다른 의견을 가지더라도 교회에 불화를 가져오는 것이 아닌가 하고 스스로 포기하거나, 의견을 개진하더라도 ‘뭘 모르고 하는 소리’로 묵살되거나, 교회공동체 의사결정과정에 반영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일반교인들은 공동의회나 제직회에서 생각이 다르더라도 벙어리가 되거나 교회의 의사결정과정을 주도하는 특정인(담임 목회자 또는 소수가 지배하는 당회)의 생각에 그냥 맡겨버린다.


3. 인격적 자율성

왜 하나님은 타락한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가?
하나님이 타락한 인간들이 돌아오기를 참고 기다리시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기반을 둔 아버지와 아들로 형성된 공동체성 때문이다. 아담의 타락 이후 효율성(공의)만을 중시하였다면 인간들은 그 죄값으로 이 땅에 존재할 수조차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효율성만을 강조하지 않고 사람들의 인격적인 자율성을 존중하셔서 스스로의 결정으로 돌아오기를 독생자를 보내기까지 기다리면서 사랑으로 인간들과의 공동체성을 회복하셨다. 거부할 수 없는, 공의차원을 넘어선 사랑으로 인간들을 감싸 안으신 것이다. ‘창조주가 피조물이 스스로의 인격적인 결정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는 사실’만큼 우리에게 공동체의 필요성을 직접 요구하는 것은 없다. 누가 감히 하나님도 기다려주신 ‘피조물의 인격적 자율성’을 무시하고 자신의 생각을 타인에게 강압적으로 요구할 수 있는가!

창조주와 피조물간의 공동체성은 창조주가 스스로 십자가의 도를 통하여 해결하셨다. 이제 남은 것은 이 땅에 하나님나라 공동체를 하나님나라 백성인 인간들이 서로 사랑하면서 세우기를 요구하신다.
그래서 첫째 계명은 하나님을 마음과 몸과 뜻을 다하여 섬기라 하셨고 그 다음의 둘째 계명으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다(막12:29~30). 그리고 창조주는 그의 아들을 통하여 새 계명을 제시하면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고 피조물들에게 요구하셨다. 하나님이 우리들을 인내와 사랑으로 기다리신 것같이 우리도 지체들간에 서로 기다리고 이해하며 조정하기를 요구하시는 것이다.


4. 공동체성 형성

성경이 직접적으로 교회가 민주적인 절차를 채택하라고 요구한 적은 없지만 교회의 주인인 예수님이 요구하신 공동체성을 확보하는 방법으로 구성원간의 이해와 합의를 존중하는 민주적인 절차(주의: 민주라는 용어는 사람이 주체적 주인이 된다는 관점에선 바람직하지 않은 용어이지만 구성원의 합의를 형성하는 관점에서의 용어로 범위가 국한하여 사용함)가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다.
분명한 죄인이지만 하나님은 죄인들이 깨닫고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사랑으로 기다리면서 우리를 공동체로 불러주신 것과 같이 교회가 진정한 공동체가 되려면 처음에 이해되지 않더라도 서로가 다른 점들을 같이 고민하고 씨름하면서 맞추어가고, 사랑으로 서로 이해하고 공감할 때까지 기다려 주는 과정이 필요하다. 민주적인 절차는 뛰어난 철인(哲人)에 의한 일방적인 결정이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들이 직접 참여하면서 서로 이해하고 조정하면서 지체인 구성원들이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만들어 가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신속성과 효율성을 이유로 교회의 방향이 특정인의 결정에만 따른다면 성경말씀에 따라 교회가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특정인의 생각이 교회의 기준이 되어버린다. 설사 특정인이 바르게 서있기 때문에 문제없다고 할 수 있지만 이는 스스로 선 줄로 생각하는 교만함(고전10:12)과 다른 지체들에게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무시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 된다.


5. 공동체성의 확보

공동체 구성원들이 같이 이해하고 조정하는 과정에 필연적으로 필요한 것이 약속이다. 서로의 다른 의견을 조율하기 위하여서는 서로가 인식할 규칙들이 바로 공동체 규약이다. 규약이 미리 만들어져 있으면 규약은 공동체가 나아가는 방향에 대한 방향타 역할을 하고 문제발생시마다 해결하는 기준이 된다.
따라서, 설사 교회 공동체의 결정이 제3자가 보기에는 비효율적이고 어려운 결정이었다고 하더라도 공동체가 같이 공감하면서 같이 이겨나가는 과정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요구하신 새 계명을 우리가 실천하는 것이고, 교회가 (믿음의) 공동체로 일어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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