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정의와 사랑의 관계성

 

경제적 이해관계의 충돌로 사회 각 방면에서 고조되는 갈등을 우리는 단순히 ‘갑과 을’의 관계로만 보는 경향이 있다.

‘갑과 을’의 관계는 철저한 자본주의적 약육강식의 논리를 기초로 관계를 설정하기에 사람들을 갑의 입장이 되도록 유도한다. 상대방인 을을 본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주무를 수 있는 갑의 입장은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안정 구조를 추구하는 인간에게 절대적 선으로 다가온다. 그러기에 갑의 위치가 아닌 사람은 갑의 위치에 도달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갑의 위치에 있는 사람은 이를 계속 유지하고 한걸음 더 나아가 자손대대로 계속 갑의 위치를 물려주고 유지하려고 갖은 방법을 시도한다.

예를 들어, 근로계약관계에 있어 계약관계를 중도에 종료시키는 방법으로 근로자는 사직할 수 있지만 사용자는 해고할 수가 없다. 즉, 퇴사의 자유는 있어도 해고의 자유는 없다.

근대 산업혁명시기 이후 상대적으로 불리한 입장에 있는 근로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부여한 관계설정이 현대 노동법에도 그대로 인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용자는 근로계약관계에 있는 근로자가 능력부족으로 주어진 업무를 충실히 수행할 수 없는 경우에도 고용관계를 종식시키지 못하고 계속 유지해야 한다는 부담은 사용자의 경제적 손실을 의미하므로 기업주는 이를 회피할 방법을 찾기 시작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구분은 단순한 계속성의 구분이 아니라 사용자가 임의적으로 근로자와의 근로계약 계속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는 차이로, 경제적 동기를 앞세운 기업주들은 정규직보다 비정규직을 선호하며 비정규직 제도가 근로자를 지배하는 도구로 악용되기 시작하였다.

기업주는 근로의 대가인 ‘보수’를 무기로 근로자와 거래 상대방을 통제할 수 있으므로 더 많은 실탄인 가용자금을 확보하는 것은 필수적인 요건이며, 이런 경제적 종속관계에 벗어나려는 근로자와 거래상대방은 더 많은 재원을 기업으로부터 받아내려 투쟁한다. 재벌기업의 탈세는 세금을 바르게 절약하려는 차원이 아니라 거래 상대방을 다스릴 도구가 되는 돈을 더 많이 확보하려는 의도에서 나타난 결과이다.

가진 자가 더 가지고 확보하려는 관점에서 투입(input)대비 산출물(output)의 비율인 효율성 지표는 의사결정의 중요한 기준이 된다.

가난한 약자를 돌보지 않는 가진 자에 대하여 가지는 의분은 성경적이며, 이런 관점에서 경제정의는 반드시 실현되어야 할 원칙이 된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자의 부도덕함과 부정에 초점을 맞추어 이를 가진 자와 가난한 자의 대립·갈등구조로만 파악하게 되면 너무나 자본주의적 판단기준인 ‘효율성’이라는 잣대로 ‘맘몬’이 돈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현상을 간과하는 실수를 범하게 된다. 경제정의를 외치면서 정작 동시에 회복해야 할 본질적 가치를 논의하기를 잊어버리게 된다.

‘맘몬’의 의도를 밝히고 대적할 교회조차 때로는 효율성이라는 경제논리에 지배당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교회도 예산(돈)이 있어야만 사업을 하고, 교회가 본질적으로 베풀고 나누는 일조차 표면적으로 경제적 손해라고 생각하며 거부하고 있기에 사회는 교회를 경제적 강자로 인식하고 교회를 적대시하는 현실이다.

경제적 관계는 대립구조가 아니라 더불어 같이 살아가는 공동체의 경제활동 관계다.

경제적 이해관계 이전에 하나님나라 백성 공동체로서 구성원들의 필요를 서로 짊어지는 관점의 회복이 우선되어야 한다.

기독교인들이 손해 보면 어떤가, 교회가 손해 보면 어떤가, 우리의 손해로 하나님나라 사랑이 전해질 수 있다면…

교회가 외치는 십자가 사랑은 당신의 몸을 버리신 희생이 있음을 전제로 전해질 수 있다. 교회와 기독교인들의 사랑의 희생을 전제로 하지 않는 경제정의는 공동체를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들간의 갈등을 고조함으로 공동체를 해체하는 결과를 초래하며, 이는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새 계명과 전면 대치된다.

‘공의’와 ‘사랑’이라는 두 가지 상반된 속성을 십자가 구속사건으로 몸소 보여주신 하나님 기준이 우리의 기준이 되어야 하고, 교회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원문보기)
http://www.kidok.com/news/articleView.html?idxno=8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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